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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대일의 국민응원
축구(월드컵,아시안컵 등)/2006독일월드컵 서울시청 거리응원

[2006독일월드컵]윤대일이 말하는 생생한 거리응원 (프랑크푸르트 거리응원단 발대식)

by 대한민국 응원단장 2009. 2. 17.

필자는 현지교민의 초청과 SK의 후원을 통해 독일월드컵이 펼쳐지는 곳중 프랑크프루트, 방크아르마 경기장에 방문했습니다. 2006년 3월11일 독일프랑크프루트 늦은 오후시간에 행사가 펼쳐졌다. 본행사는 독일 현지교민들이 하나되어 2006독일월드컵에서 거리응원을 선보임으로서 한국의 응원문화를 세계에 알리며 프랑크푸르트 현지에서 거리응원 공간을 형성해 한국의 응원문화를 선보이는데 중점을 두고 그 첫단추를 끼우는 작업으로 현지교민분들과 함께 연대하여 거리응원단의 발족을 하는 행사를 치르게 된것입니다.

필자는 유럽에 처음 오게되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을때 필자가 시골사람처럼 행동하는걸 보고 함께 온 스텝들이 웃었습니다. 독일의 문화도 체험하게 되는 이번원정에 필자는 많은 기대를 가지고 왔습니다.
첫날 여장을 풀고 발대식이 펼쳐질 프랑크푸르트 방크아르마 경기장을 답사했습니다. 이 경기장이 바로 차둘이 선수가 소속된 팀의 경기장이란 소식을 접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차둘이 선수가 뛰어 나올것같이 잘정리되고 잔디도 깔끔했습니다. 답사라는 차원에서 경기장 잔디를 밟아 볼 수 있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인조잔디인데 신기하게도 인조잔디 속에 고무로 된 미세한 검정 스펀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잔디를 발로 차면. 마치 모래처럼 검정스펀지가 튀어오릅니다. 무척 신기했습니다. 이게 완충역할을 해주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조잔디속에 부드러운 고무모래라, 정말 색다른 촉감과 경험이었습니다.
발대식 당일입니다. 준비하는 손길이 바쁘게 진행되었구요. 필자도 일찍 경기장에 나와서 이것저것 행사진행을 위한 작업에 도움이 필요한곳을 지원했습니다. 한쪽편에 무대로 개조되는 트럭이 설치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안에 모든 장비가 들어있었습니다. 조명. 음향, 등등 국내에서도 비슷한 장비가 장착된 차량을 보았지만 보통 완성도가 떨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완벽한 시스템을 자랑하더군요. 신기했습니다. 독일현지 행사업체에서 제공된거 같았습니다. 역시 독일의 기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스텝들과 손발을 맞추기 위해, 독일유학생들이 통역 자원봉사자로 나서 주어서 큰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친구들의 도움으로 여러가지 환경을 정리할수있었습니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면서 독일에 사시는 한인분들이 하나둘 경기장 특설무대앞쪽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프랑크푸르트 날씨가 정말 오락가락 하더군요. 우리가 준비하는 중에도 비가 와서 잠시 피했다가 다시 설치하는 일을 몇번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변덕스러운 날씨에 늘 대비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젖은 의자도 닦고 오신분들이 잘 앉을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회자의 역할또한 필자의 부문이라 공식행사 사회도 필자가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한인회 분들의 소개와 임원분들의 인사말씀이 있었습니다.
이후 거리응원단의 발족사와 선서식이 이어졌습니다. 공식행사를 마치고 내려와서 오신분들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무대에서 강한 조명을 받으면 관개석의 얼굴이 잘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가수분들은 강한 흥분의 열기를 요구하는 것이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깜짝놀랐습니다. 내려와서 간접조명을 통해 관객석에 앉은 분들을 보니 대부분 환갑을 넘기신 노인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원봉사로 온 유학생들은 20%도 않되는거 같았습니다. 좋지 못한 일기로 인해 예상했던 인원보다 적었지만, 그와중에도 대부분이 노인분들이니 앞으로 응원전을 이끌어야 할일이 깜깜했습니다.
공식행사가 끝난뒤 락공연팀의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역시 노인분들에게 반응을 기대한다는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필자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대에 올랐습니다. 공식행사 사회를 보던 사람이 무대에 다시 올라오는 모습을 보시고 놀라시는 눈치였습니다. 마이크를 들고 늘 소개하듯이 첫말을 꺼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2002한일월드컵 당시 광화문,대학로에서 서울시청광장까지 응원단을 이끌어가며 응원을 주도했던 서울시청앞광장 응원단장 윤대일입니다. "
이말에 벌써부터 큰박수를 보내주셨습니다. 다시 말했습니다.
"오늘 저는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이 먼곳 독일까지 와서 대한민국이 세계를 놀라게한 거리응원문화를 이곳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세우고, 알리게 되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여러분 한국은 외화를 벌기위한 과정으로 독일은 전문인력 원조의 차원에서 과거 간원사님와 광부들이 이곳에 파견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당시 진정한 애국자는 외화를 벌어 한국을 부유하게 했던 이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십니다. 힘없는 조국때문에 많은 실망과 외로운 날을 보내셨지만 이제 세계인 누구도 축구잘하는 한국의 위상과 열정의 응원을 가진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오늘 이자리에서 한세대를 앞서 사신 선배님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목놓아 부르면서 그간 외치지 못하고 눌렸던 앙금들을 날려버리고, 장성한 2세들과 하나되어 애국의 마음, 대한민국으로 하나되겠습니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애국인들이여 억눌린 대한민국의 한을 오늘 이곳에 풀어 놓읍시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정말 이렇게될줄 아무도 몰랐다. 골다공증부터 류마치스신경통까지 온몸이 쑤실거 같은 분들이 일어서서 필자의 응원동작과 구호를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윤도현의 '아리랑'을 부르며 응원할때는 감동에 울고 계신분들을 볼수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유학생들과 교민2세들이 튀어올랐습니다. 이말이 가장 적당한거 같습니다. 정말 튀어올랐습니다. 팬스위로 올라와 그룹을 이루고 노인분들 사이사이로 들어가서 어깨동무를 연출합니다. 그리고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윤도현이 불러서 응원곡으로 편곡된 것입니다. 전혀 하나될것 같지 않았던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또 서로를 이해할수없었던 세대들이 하나되었습니다. 필자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발족식을 위해 무언가를 알려주는 형식적이 자리가 아닌, 눈물로 하나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고 예정시간을 초과해서 응원전이 이어졌습니다. 더이상 경기장을 사용할수없다고 경기장측이 제시한 최후에 시간까지 응원전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필자는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저는 대기실에서 잠시 물한잔을 마시고 20분정도 쉬었다가 경기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무슨일일까요? 노인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필자를 만나고 가야한다고, 울면서 악수하는 간호사출신 할머니, 광부로 와서 지금까지 살고계신 할아버지, 전부 제얼굴에 뺨을 부비고 손에 입을 맞추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런날이 올줄 몰랐어, 정말 이런날이 올줄 몰랐어, 가슴이 뻥 뚫어진거 같아 젊은이, 우리집 방안에만 있었던 태극기였는데... 우리 남편이야. "
놀랍게도, 그분은 독일분이셨습니다. 나를 보시자 그분도 '대한민국'하면서 응원동작을 해보이셨습니다.
할머니는 2002년 한국의 뜨거운 응원이 독일에도 알려지면서 이번 독일사람들이 축구와 응원 잘하는 한국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남편과 한국을 이렇게 하나되서 외쳐본게 너무도 감동이었다고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다. 많은 분들과 악수를 하고 무슨사연이 그렇게 많으신지 필자에게 계속 털어 놓으셨다.
추후 이런 감동은 필자에게 원정의 응원의 중요성을 알게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원정응원을 통해 교민들을 하나로 모으고, 2세,3세들에게 한국의 응원과 응집의 문화를 알리는 전도사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뒷풀이를 한국식당에서 가졌고 모두가 애국의 밤을 보냈습니다. 필자와 고향이 같은 한 여자유학생이 기억났습니다. 식당에 들어오고 나서 계속 울고 또 울더군요. 유학생활의 어려움과 외로움이 위로가 된거 같아보였습니다. 법학을 전공했던 분으로 기억됩니다. 현명한 법관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