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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대일의 국민응원
올림픽/2004아테네올림픽 거리응원

[2004아테네올림픽]윤대일이 말하는 생생한 거리응원 ( 맥시코전 축구 )

by 대한민국 응원단장 2009. 2. 9.

2004년아테네올림픽을 말할때 많은 아쉬움이 남는것을 느낍니다. 2004년부터 본격화된 대한민국응원단 태극전사서포터즈의 출발과 동시에 올림픽게임의 참가하는 대한민국대표선수들을 아테네현지에 원정응원단 파견 부문과 국내에서 펼치는 대규모 거리응원전까지, 실로 아테네올림픽을 통해서 응원문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기를 삼을것이라 낙담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이 그렇지만 무리한 예산편성과 수익사업을 목표로 한 계획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지원받는것이 어려웠고, 결과적으로는 해외원정응원을 보내는 부문은 무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뼈 아픈 경험이었습니다. 일전에 SBS와의 거리응원 특집방송에서도  무더위와 홍보가 미흡해서 성황속에 응원전이 펼쳐지리라 생각했던 일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여파가 방송과의 연계도 무산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안타까왔습니다. 좀더 치밀하게 준비했다면, 하는 아쉬움을 간직한채 여름응원캠프를 마쳤고, 거리응원문화의 이해와 체험의 장을 통해 많은 회원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올림픽이 시작되는 시점앞에서, 우리가 계획했던 대규모 거리응원전뿐만이 아니라, 응원전 자체가 고사하게 될처지였습니다. 아테네와 한국사이, 늦은 저녁시간때 관전해야하는 시차상의 악조건 또한 넘어야 할숙제였습니다.

그리고 다들 잠잘시간에 떠들면서 응원 할 수 있는 공간의 확보 또한 어려웠습니다. 그중에 가장어려웠던건 어느곳도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고생고생해서 태극전사 응원캠프까지 마쳤고, 거리응원문화에 대해 관심과 이해를 만들어 놓았지만, 막상 응원할곳이 없다는게 속이 터져버릴거 같았습니다. 축구로 시작된 응원문화이기 때문에 축구경기를 시작으로 응원해 나가는 전략이 최우선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포기하지 않고 이곳저곳 응원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장소는 없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나올사람도 없었구요. 경기시간 또한 새벽 12시경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모두가 그냥 우리끼리 모여서 호프집에서 보면서 응원하자고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아무데도 할곳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시간에 경기를 틀어주는 곳도 없었고, 그런던 순간 필자가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있는 춘천시청5거리 전광판에서 새벽에 경기를 중계한는 정보를 얻을수있었습니다. 이소식을 집행부에게 전했습니다. 하지만 지쳐서 인지, 적극적으로 응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포기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필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많은 계획과 예산을 가지고 준비하던 거리응원행사가 스폰서와 지원처가 없어 도중하차하게 되자 그실망에 아무것도 할수없어지는 마음 충분히 이해할수는 있었지만, 저는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사무국장에게 다가가서 제뜻을 전했습니다.

" 국장님 저는 범국민적 응원문화를 위해 이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예산과 그리고 큰계획으로 멋지게 화려하게 세상에 등장해서 거리응원문화를 알리는 것도 꿈입니다. 그보다 저에게는 모두가 자는 이시간에 열정을 가고있는 우리는 깨어서 선수들을 응원한다는 살아있는 염원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도, 그일을 하고싶습니다. 거리응원문화의 진정한 발전을 꿈꾼다면, 어떤 악조건에서도 우리는 그일을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냄비근성에 벗어나 정열의 한국과 거리응원문화의 증인이 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국장님이 다 들으시고 일어서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춘천에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고문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한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명, 이렇게 해서 5명의 인원모아졌습니다. 필자의 차량이 카니발이었기 때문에 응원용북과 응원복은 항상 실려이었습니다. 모두가 태우고 춘천으로 출발해서 오후 10시경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춘천시청5거리에 도착해서 로터리 인근 은행건물에 차를 임시주차했습니다. 어느누구하나 오라고 한사람 없었습니다. 반겨주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거리는 횡하니 가끔 교차로를 지나가는 차량들만 보일뿐입니다. 일찍부터 취한 취객만 몇명 보이고 정말 한적한 시골 동네였습니다. 모두 배가 고파서 바로앞 유명한 춘천닭갈비집에 들어갔습니다. 닭갈비를 시켜먹으면서, 주인장에게 물어봤습니다.

" 여기 거리에 12시 넘으면 사람 많은가요? "

" 요즘 장사않되요. 아저씨, 찬바람좀 불어야 될거 같아요. 여름엔 철원이나, 홍천쪽으로 사람들이 다빠져서 춘천엔 별로 관광오는 사람도 없고, 또 휴가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좀 한산해요. 왜 그러시는데요? "

"아니예요 그냥 너무 조용해서요 "

필자는 머쩍은듯이 머리를 쓰러내리며 둘러댔습니다. 그말에 사기가 한번더 꺽였습니다. 다들 필자를 바라보고 한숨을 쉽니다. 앞으로 2시간가량 남은 시간, 소주를 한병시켜서 한잔씩 더기울였습니다. 

" 형님 하늘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허락했다면, 우리가 판을 펼쳐서 신명나게 응원하고 가면 될거예요. 비록 우리 5명이 독수리5형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목표로 한 거리응원을 펼치고 가요. 그러면 돼요. 형님 힘내세요"

필자는 같이간 집행부들을 위로했다. 
시간이 다가왔다. 사전에 미리 강원일보에 부탁을 해서 인근 경찰초소에서 전기를 공급받기로 약속했고, 미리가지고 간 행사용 음향장비(엠프)를 연결하고, 거리응원전을 준비했다. 붉은색 셔츠를 갈아입고, 응원곡 CD를 연결해 응원가를 틀어놓았다. 그래도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드디어 전광판에 축구경기가 중계되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애국가가 울려펴지고, 아나운서의 격정적 목소리가 울려펴진다.
우리까지 10명정도 모였다. 음악을 틀고 경기가 시작되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필자는 마이크를 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는 대한민국응원단 태극전사서포터즈입니다. 올림픽 출전 전종목 선수들을 응원하는 대한민국응원단입니다. 아울러 저는 2002한일월드컵 당시 서울시청앞광장에서 거리응원을 주도한 응원단장입니다. 비록 몇명 않되는 인원이지만 오늘 서울에서 이곳 춘천까지 내려온 이유는 오늘 아테네올림픽 축구경기 맥시코를 춘천시민들과 함께 응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응원의 불을 이곳 춘천에 지피러 왔습니다. 함께 이곳 광장에 나와서 응원에 동참해 주시길바랍니다. 대한민국의 승리의 순간을 여러분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응원곡을 틀었습니다. '오필승코리아', '아리랑' 등의 익숙한 응원곡을 집중적으로 틀었고 일당 백의 마음으로 5명이 뛰었습니다. 정말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잠시 고개를 돌려보고 놀랬습니다. 200여명이 넘는거 같았습니다. 집에서 주무시던 아저씨는 북을 가지고 나오셨고, 한분은 꽹가리 들고 나오신분도 보였습니다. 피티병을 들고 두드리고, 어디서 구하셨는지 붉은색 옷을 입고 나오신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서포터즈 옷을 입고 나오신분, 머리에 띠를 띠고 오신분, 뒷편 먹거리촌에서 술드시다 같이 나오신 분, 연인끼리 같이, 그리고 잠자다가 파자마 바람에 나오신분까지 아주 다양했습니다. 우리 5명은 모두가 놀랐습니다. 정말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던 황량한 곳에 사람이 200여명 모여있다는 건 상상이 않되는 일이었습니다. 옆에 서있는 경찰초소에 계시는 경관님이 갑자기 증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보내는걸 알았습니다.
소방대원 몇분이랑 경찰력 몇분이 나와서 차도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경광봉을 들고 서계십니다.
드디어 1:0, 한국 첫골 김정우와 김두현의 호흡에 의한 김정우의 통렬한 중거리슛의 골이 터졌을때 모두가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귀중한 첫골 겸 한골은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일대의 분위기는 2002한일월드컵 당시의 분위기를 능가 했습니다.
모두가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합니다. 땀범벅에 목소리는 이미 걸걸한 시장표 아저씨 되있었습니다. 응원단은 300명까지 되었습니다.  후반경기내내 이 인원이 유지되면서 응원열기는 더욱뜨거워 졌습니다.
경기를 승리로 마치고, 모두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얗게 밤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강원일보 기자들과 강원도민일보 기자들이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역시 발빠른 기자분들^^ 취재열기로 인터뷰요청에 답했습니다.  소개인사의 내용을 인터뷰했고, 태극전사서포터즈라는 단체에 대해 다시한번 자세하게 소개하였습니다. 함께 했던 형님들의 눈에 기쁨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해낼 수 있을거라 말했던 대로 우리는 5명의 인원으로 거리응원을 성공적으로 마쳐냈습니다. 이날의 감동은 태극전사서포터즈의 가장 위대한 업적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이튿날 춘천에 모든 방송과 언론에 어제의 일화가 소개 되었고 전국에 응원의 불이 당겨졌습니다.

새벽미명을 밟으며 서울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