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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대일의 국민응원
대한민국 응원

[토즈기사] 2002년 그때의 광화문을 기억하시나요? - 윤대일 응원단장 인터뷰

by 대한민국 응원단장 2010. 6. 16.

 

http://toz.co.kr/magazine/toz_space_view.asp?seq=76

전국민이 일제히 "대한민국"의 붉은 함성을 외치며

거리를 가득 매운 불결 물결은 눈이 시리도록 강렬하고 짜릿했다.

여름날의 더위도 녹여낼 만큼 힘찬 응원의 열기는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낸

2002년의 기적으로 기억된다.

 

 

전국민이 일제히 밖으로 나와 거리응원에 동참했던 그때,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2002 월드컵, 서울 광장 거리응원의 중심에 윤대일 응원단장이 있었다.

허스키하고 힘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서 월드컵의 열기가 고스란히 배어져 나오는 듯 하다.

월드컵의 역사 뿐 아니라 거리응원 문화의 역사를 새로 썼었던 지난 월드컵 경기의 추억과 함께

다가오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준비에 분주한 윤대원 단장을 만나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현재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아자코리아(www. ajak.co.kr) 라는 단체를 운영하면서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까지 응원을 하고 있어요.

이런 문화를 해외에 있는 교민들에게도 전파하고 화합하는 힘을 주고 싶어요.

해외 원정단을 보내 해외 응원을 지원하고 '응원문화'를 우리나라 축제로 자리잡는데 역할을 하고 싶어요.

 

칭찬은 텔레비젼에서도 다룬 적이 있어서 활성화 되어 있어요. 하지만 방향성이 있어요.

윗 사람이 아래 사람이 아랫사람을 칭찬을 하는 것이지 쌍방은 아니죠. 하지만 응원은 쌍방이 가능하죠.

내가 응원하는 것이 이런 응원문화에요.

 

내가 응원하는 응원문화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북돋아주는 거에요.

단순히 경기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 문화처럼 우리의 정신적인 흐름을 가진 응원문화로 정착시키는 거죠.

   

-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 단장겸 MC를 맡으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당시 전문 MC로 한창 활동하고 한창 활동하고 잇었어요.

그러던 중 모 기업에서 응원 MC제의를 했어요. 처음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여름에 날도 더운데 거리에서 응원을 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이가 각별한 친구가 연관돼 있었는데 그 친구가 적극적으로 하자고 제안을 해서 동참하게 됐어요.

 

함께 응원단을 만들고 붉은 악마와 함께 준비를 했어요.

저랑 4명의 응원 단장 정도가 함께 했어요.

같이 응원을 준비하면서 1~2주를 연습하고 준비하고 붉은 악마의 운영진들한테 교육을 받으며 연습을 했어요.

 

 

-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은 어떻게 이루어진 건가요?

 

단순히 준비를 해서 몇월 몇일 준비해서 하자고 빵 터트린게 아니에요.

2002년 월드컵 전에도 동아 면세점 앞에서 북치고 응원하는 소규모 행사는 진행되고 있었어요.

경기장에 못 간 붉은 악마들이 이렇게 응원을 했고 소규로나마 진행이 되고 있었죠.

그런 응원 경험을 모델로 해서 SK와 연대해 프로젝트를 만들게 된거에요.

 

월드컵 시작 전에 전국적으로 캠페인을 시작했어요.

서울2개 경기 2개 팀으로 나누고, 부산과 광주, 대구, 대전 등

전국에 여러 팀을 나눠 응원 준비를 진행했습니다.

응원단장겸 MC 1명, 써포터즈 10명, 치어리더 10명 등 20여명이 한팀으로 구성되어

영상과 음향기기를 탑재한 트럭을 타고 전국에 포진되는거예요.

 

캠페인을 전국적으로 한달 동안 진행했어요.

티셔츠와 기념품을 나눠주고 그때 당시 한석규씨가 나온 월드컵 응원 CF영상을 방영하면서

응원구호와 박수도 알려주고  "○월 ○일, 경기가 있으니까 나오십시오" 하며 거리 응원전을 홍보했어요.

 

 

- 거리응원은 어디서 시작 되었나요?

 

서울에서는 세종문화 회관으로 모이라고 홍보를 했었어요.

마침 잉글랜드 평가전이 있었고 한달 동안 캠페인한 뚜껑이 열렸죠.

그날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거리응원에 참여했어요.

광장이 꽉차고 계단과 난관도 다 채워지고 콘크리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었어요.

 

다들 놀랬죠.

 

기자란 기자들이 다 왔어요. 전국 방송에 탑 뉴스로 나왔을 거에요.

잉글랜드 평가전에서 성적이 좋았어요.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경기 내용이 너무 안좋았어요.

그런데 경기 내용도 좋아서 이전까지 실망하던 경기에 봄바람이 불었죠.

 

다음 프랑스 경기가 있었는데 잉글랜드 전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차선을 두개 정도 점유할 정도였어요.

이런 거리응원에 국내 뿐 아니라 해외 언론에서도 떠들석했고

해외 언론과도 여러차례 인터뷰를 할 정도였어요.

 

그때 5만명 정도가 몰리면서 경찰, 소방서, 국기기관에사도 긴장을 했어요.

이때부터 제 목소리도 좀 더 커졌어요.

 

2002년 월드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폴라드와 첫경기 응원은 대학로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경기에서 이겨보자는 염원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20만명의 사람들이 몰렸어요.

이날 경기에서 이기자 완전히 난리가 났었죠. 도로가 통제되고 사람들이 응원을 하면서

주위 상점들이 영업을 못 하게되어서 SK에서 대학로 주변 상가에서 쓸 수 있는 2만원 쿠폰을 발행했어요.

그런데 술집에서도 우승 기념으로 공짜로 제공하는 많았어요.

 

때 이후로 목소리가 다 쉬기 시작했어요.

때부터 제가 유명해졌어요.

악수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하려고 했을 정도니까요.

이 이후에는 서울 시청광장에서 응원단장으로 활동을 했어요.

 

 

-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월드컵 하면 많은 것이 기억나지만 미국전이 기억이 나요.

그때 비가 많이 왔어요. 비가 오는데 응원하라며 할까요? 안 할 가능성이 크죠.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앉았어요.

그때 모인 인파가 100만 명 정도 였어요.

이 정도 수라면 꽉 끼여 꼼짝할 수 없을만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산 갖고 온 사람들이 많잖아요.

우산 쓰고 앉으면 뒤에 사람들이 안 보이고 응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우산을 내립시다. 우리가 응원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지,

열정을 위해서 응원하는 것이지 비 때문에 응원을 안 할 수 없잖습니까"

 

말이 끝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우산을 다 내렷어요.

그때 깜짝 놀랬어요.

 

어린 아이부터 할아버지 까지 다 우산을 내리고

우비를 입은 사람들 마저도 우비를 벗고 붉은 티셔츠로 응원에 동참했어요.

 

 

불이 난 적도 있어요.

서울 시청 광장에서 응원할 때였는데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거리응원에 기분이 도취되어 폭죽을 터트린 거에요.

 

"폭죽을 터트리지 마세요" 여러차례 공지를 했지만 결국 사고가 터졌어요.

시민들이 터트린 폭죽의 불이 재능교육 센터 앞에 있던 현수막에 붙었는데

사람들은 되려 불이 난 것에 열광을 하는 거에요.  

 

그때 그 자리에 150만명 정도가 모였어요.

서울 광장에서 남대문, 광화문, 을지로 입구, 신세계 백화점, 문교동까지 사람들로 꽉 찬거에요. 

소방차가 진입을 해야하는데 남대문에서 인파에 길이 막혀 들어오지 못 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 길을 열어주세요" 했더니

빨간색 붉은 묽결이 홍해가 갈라지듯이 길이 열리는 거에요.

 

한번에 수많은 인파가 만드는 바다같은 물결이 감동이었어요.

그 뿐 아니라 불꺼달라고 그때 소방대원을 응원하는 거에요.

소방대원이 불을 끌 때, 퇴장 할 때 "대한민국"이라며 다같이 응원하며

소방대원을 위해 열심히 응원했던 일화가 기억에 남네요.

 

 

 

- 2002년 월드컵 응원에 구호나 응원노래가 한몫 했다 할 수 있는데요.

구호나 응원가는 어떻게 만들어진건가요?

 

박수나 구호같은 경우는 붉은 악마가 만든 거에요.

과거 K리그 초창기에 축구팀 응원단들이 곡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당시 수원삼성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먼저 사용하고 있었어요.

2002년 월드컵 응원을 대비해서 붉은 악마 내에서 회의를 했는데

"오~ 필승 코리아"와 "대~ 한 민국"구호가 채택돼 사용이 되어졌어요. 

 

 

- '2002년-2006년-2010년' 월드컵 응원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요?

 

2002년은 이런 것이 처음이었고 기적적인 승리를 이뤘기때문에

한계단 올라갈 때 마다 사람이 몇배씩 몰렷어요.

16강전 부터는 들끓었다고 볼 수 있어요.

 

2006년에는 선수들이 부진하면서 월드컵 응원단에 포커스가 맞혀지면서 문제가 부각이 되었어요.

쓰레기를 버린다거나, 성추행을 한다거나, 차량을 훼손한다거나, 오토바이로 폭주를 한다 등의 문제가 불거졌죠. 

선수들의 경기가 부진하면서 사람들이 분노를 표출하면서 문제시 되었죠.  

 

2002년은 활성화, 2006년은 거리의 문화의 맥은 지켜나갔고 2010년의 경우 극도로 상업화 되어있어요.

 

중계권 문제부터 달라져요.

2002년은 중계권이 없었고 2006년에는 있었지만 이렇게 비싸지 않았어요.

거리 응원하려면 이제 어마어마한 액수들을 기업들이 내야하고 거리응원에 비용적인 부담이 커졌죠.

 

 

2010년 월드컵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요?

 

응원은 염원을 담아야 하거든요.

저는 태극기로 마고자를 만들었어요. 이번에 그것을 입고 응원을 할거에요.

염원이라는 것은 티셔츠를 사서 입거나 거리에 나오는 것 등으로 할 수 있지만

이왕이면 거리에 나왔으면 좋겠어요. 바디페인팅을 하거나 응원구호를 쓰던가

응원 소도구를 적극 활용 해서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요.

응원이라는 것은 친구랑 텔레비젼을 보는것과 사람들과 한데 어우지는 것은 천지 차이거든요.

 

똑같이 빨간 티셔츠를 입으면 자유와 표현이 제한됩니다.

빨간색이라는 틀 안에서 독특한 나만의 자유로운 표현이 다이나믹하고

해외에 우리나라 문화를 알리는 데도 좋을거 같아요. 

 

 

-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거리응원 전망은 어떤가요?

 

현재는 거리응원문화가 중계권 때문에 축소될 확률이 높아요

두개의 방송사에서 중계를 못 하니까 캠페인을 못 하잖아요.

그 시간대에 드라마나 특집을 편성한다 하더라구요.

거리응원을 위한 CF나 캠페인 등으로 사람들에게 거리 응원을 알리고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을 못 하기 때문에 거리응원까지 연결되기가 어려운 분위기에요.

 

기업의 입장에서는 거리응원 위치 선정에 어려움이 있고

중계권으로 인한 부담으로 인한 어려움과 업체간의 과다경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익이 있어야 발전을 하거근요.

이런 문제를 완하하기 위해서는 각 기업들이 연계해서 행사를 함께 진행하면 어떨까 해요.

홍보 현수막도 같이 걸고 기업들이 함께 홍보를 할 수 있게 협력하는 분위기가 유도됐음 좋겠어요.

 

 

거리응원문화라는게 유네스코에 등재가 돼있어요.

세계 100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가 인정을 한거지요.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응원에 대한 역사가 짧아요.

하지만 거리응원우리만의 특색 있는 문화라 할 수 있어요.

한국 사람들의 축제적인 거리문화를 세계인들이 높이 평가하는거에요.

 

세계가 알고 있고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적인 문화인데 경기장에서 선수들에게 힘을 주는 응원하는 문화와 함께 거리의 응원문화를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