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윤대일의 국민응원
행복한 생활/윤대일 책출판

출판2.0[오프라인온라인에접속하다]거리응원문화축제

by 대한민국 응원단장 2009. 2. 26.
 필자는 2002FIFA한일월드컵 당시 광화문,대학로를 이어 서울시청앞광장까지 거리의 수십만의 응원단을 이끌고 응원전을 주도한 거리응원단장입니다.  이후 지금까지 응원문화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지난 ’2009블살다에 이어 좀더 심화된 내용으로 두번째 글을 연재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2002한일월드컵에서 붉은 물결을 동반한 대규모 응원단의 길거리 축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패션,스타일,노래,구호,박수 그리고 열기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고의 축제문화로 평가되었습니다.  20026월내내 연인원 22백만명이라는 경의적인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한국 고대사의 부족축제였던 영고,무천,동맹과 맥을 같이한 대규모 축제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공백을 보인 거국적 축제문화의 부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제 축구응원으로 시작된 대한민국의 축제적 응원문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축제문화로 정착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역사 속 응원문화

부여의 영고(迎鼓) 하늘에 제사 지내던 의식으로서 맞이굿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행사는 추수가 끝난 12월 무렵에 열렸으며 동네마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천신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를 즐기는 등 서로의 친목을 도모  하였고,  또한 중대한 의사결정을 하거나 죄수들을 방면해주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10월에 행하던 제천의례(祭天儀禮) 행사로서, 이 역시 농경 부족 사회 공동 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추수감사제 성격이었습니다. 동예의 무천(舞天) 또한  행하던 제천행사로 해마다 음력 10월에 공동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전체 부족민이 춤과 노래를 즐기는 흥과 화합의  축제적 의식이었습니다.

 이런 축제적 의식은 바램과 구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마음 한 뜻으로  비가 오지 않아  가뭄으로 그 해 농사를 망치게 되었을 때  부족민 전체가  하나되어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고,  재물을 받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재난이 닦쳐 올 때마다  천재라고 하여, 그때마다 부족민 전체가 하나되어 재물을 바치고 하늘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제천의식의 기초가 바로 응원문화입니다.  개인 또는 집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두가 하나되어 한 뜻으로 화합하며, 힘을 북돋아주는 일,  이것이 응원문화의 시작입니다.  이런 응원문화를  통해  천재를 극복하고 가뭄이 해갈된 뒤  추수를 맞은  부족민들에게 추수에 대한 감사를 하늘에 돌리는 추수감사축제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축제적 응원문화입니다.  이런 응원문화는 과거 많은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외세침략과 분단의 아픔, 독재와 유린으로 사라져 버렸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그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펼쳐지던 날 한국과 일본이 경쟁적으로  월드컵을 공동 유치한 그날,  일본은 하지 못했지만 우리는당당하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응원문화를 선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많은 나라들이 우리의 거리응원문화를 밴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규모 거리응원문화의 시작이 곧  축제적응원문화의 새로운 부활인 것입니다.  이 축제적응원문화가  곧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 합니다. 브라질의 삼바축제, 리우카니발, 일본의 마쯔리,등의 세계유명축제가 있습니다.  그 속을 살펴보면  유명축제는 오래된 전통과 역사를 유지시켜주는 범국민적 참여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축제라도 국민들에게 외면 당하고 흥미가 없다면  그것은  다시 재고해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계인들의 검증을 통해  익숙한 문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이태원, 동대문 등 의 쇼핑타운에서  2002년에 날개 돗친듯

팔려나간  ‘Be the Reds’셔츠를  구매하는 모습을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는  거리응원 문화축제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내용이 의식적 차원의 문화로 접근했다면  이제 소개할 내용은 정서적 차원으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이 가지는 응원문화는 과거 조선시대의 두레, , 향약 등의 문화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두레는 원시적 유풍인 공동노동체 조직이며 농촌 사회의 상호 협력, 감찰을 목적으로 조직된 촌락 단위입니다. 우두머리를 좌상(영좌)라 하고, 두레를 표시하는 기()가 있었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였습니다. 두레가 이행하는 공동노동의 형태는 모내기·물대기·김매기·벼베기·타작 등 논농사 경작 전 과정에 적용이 되었으며, 특히 많은 인력이 합심하여 일을 해야 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거의 반드시 두레가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마을의 공동 잔치로 풋굿이나 호미씻이와 같은 논농사 이후의 놀이도 함께하였습니다. 대체로 모내기나 추수를 마친 뒤 공동작업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 가지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농사로 인한 노고를 잊고 결속을 재확인하는 것이었고, 이때 토지를 소유한 주인집에서는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흥을 돋구어 주었습니다. 는 한국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민간협동체를 의미합니다. 삼한시대(三韓時代)에까지 소급되는 공동행사의 하나로 상호부조라는 주된 목적 아래 취미 또는 생활양식의 공통분야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공동유희 ·제례(祭禮) ·회음(會飮) 등이 성행하였다. 신라 때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계가 성립 발전하였으며, 그 예로서 여자들의 길쌈내기인 가배(嘉俳), 화랑들의 조직체인 향도(香徒)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궁중경제와 사원경제(寺院經濟)가 지배계급의 모든 활동의 중심을 이루던 이 시대에는 궁중에서 보()라는 것을 조직 경영하였는데, 점찰보(占察寶) ·공덕보(功德寶) 등으로 기부받은 금전, 공동각출한 재원 및 기본자산인 토지 등을 운영하여 그 이익으로 사회사업이나 대부(貸付) 등을 하는 조직이었습니다. 그 후 고려시대에도 보는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이익사회적 조직이어서 공동사회적인 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계가 보를 닮는 등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되었고, 고려시대의 보는 공공사업의 경비충당을 목적으로 기본기금을 설치하여 그 이식(利殖)으로 각종 사업을 운영하는 일종의 공공재단이었습니다. 품앗이는 일반적으로는 노동의 교환형식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 원초적(原初的)인 의미는 ‘품[勞力]’ ‘앗이[]’에 대한 ‘품갚음[]’, 즉 증답(贈答)의 관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노동의 교환형태라고 보기에는 품앗이는 상대방의 노동능력 평가에서 두레나 고지(雇只) 또는 머슴의 경우처럼 타산적인 것이 못 되며, 사람과 농우(農牛)의 노동력 교환, 남성과 여성, 장년(壯年)과 소년의 노동력이 동등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노동력은 원칙적으로 모두가 대등하다는 가정(假定)하에 노동을 상호 제공하는 수가 많으며, 이러한 가정이 품앗이를 성립시키는 근본적 가치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레가 공동적 내지 공동체적인 것이라고 하면, 품앗이는 개인적 또는 소집단적이라는 인상이 짙었습니다. 품앗이가 짜여지는 개인 혹은 소집단 상호간에는 그 선행조건으로서 상호부조의 의식과 의리(義理)라고 할 만한 정신적인 자세와 때로는 ‘처지가 서로 비슷한 경우라야 짜여질 수 있다’는 관념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향약은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으로서 16세기에 농업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상업의 발달 등 경제적 조건의 변화로 향촌사회가 동요하고, 훈구파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었습니. 이에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士林派)는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 ·유향소(留鄕所) 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서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습니. 이것은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지주층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를 단위로 시행하였습니. [ 두산백과사전 발췌 ]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두레, , 품앗이, 향약등은 우리가 가지는 과거의 원시적 응원문화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섬 지역이나  먼 지방에서는  두레와  품앗이, 향약 등이 살아있는 것을 방송과 언론을 보도를 통해 접 할 수 있습니다.  계 문화는  현재도 아주 잘 발전해 있는 것을 우리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경조사의 부조문화가 이에 해당합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통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응원문화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화의 탄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부터 응원문화에 익숙한 정의 민족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부문을 지혜롭게 두레와 계로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며 공동체로 살아가는 지혜를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잔칫날 이웃과 떡을 나누고 즐거워했고, 저녁에 이웃집 굴뚝에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살피는 잔잔한  정의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안타까운 고려장문화도 있었지만, 짧은 한때의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문화였으며 이후 없어졌고,  백의민족인 한인들의 마음속에는 흥의 민족그리고 정의 민족이라는 깊은 인식이 남아있습니다. 

이런 역사 속 정서적 응원의 문화는 많은 전쟁과 침략에 노출되면서 어려운 시기를  맞았으며, 이념의  분단시대를 통과해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점차 감춰진 우리의 응원문화가 발휘되는 시기에 온 것입니다.  21세기에 오면서 IT강국 한국의 위상에 걸맞는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온라인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이제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펼칠 수 있는 매체가 생겼으며  또한 어마어마한 웹2.0의 세계에서 한국이 가지는 축제적 응원문화를 국가경쟁력을 가지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영구축제로 제안 할 수 있는 길이 생겼습니다. 나아가  상설 거리응원문화가 만들어 질 수 있도록 서울시청광장에 반드시 상설 거리응원마당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화공간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모을 것입니다.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공연자들이 응원을 위한 노래와 춤과 구호를 펼쳐놓는 장이 될 것입니다.   

국제적 주요대회가 펼쳐질 때마다 온라인을 통해 자연스러운 거리응원 계획 및 일정확산으로 오프라인 참가자를 독려하며, 나아가  응원현장에서 보다 재미있고 유쾌한 응원문화와  아울러 새로운 응원아이템 및 공연을 제공함으로서 온, 오프라인에 상설응원문화가 공존하게 될 것입니다. 응원의 글귀를 남기거나 영상메세지를 보내는것이 온라인 응원이라면, D-DAY에 모여 함께 경기(국제대회)를 관전하며 승리를 기원하고 즐기는 것이 오프라인의 응원문화입니다.  

 이런 실행이 바로 브라질의 삼바축제처럼  대한민국대표축제  거리응원축제를 탄생시키는 지름길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yundaeil.com (응원단장)